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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음별 등산지도/전국유명 ㉴ 산

승달산(무안)

by 강릉벽소령 2010. 2. 20.

 

 

 

 

무안군을 동서로 가르고 청계면과 몽탄면을 경계로 하는 해발 318m의승달산은 노령산맥 4대 명혈중의 하나이며 목포의 유달산과 쌍벽을 이루는 명산으로 총지사지, 목우암 등 불교사적이 많다. 3백미터가 조금 넘는 이 산이 명혈로 꼽히는 이유는 고승이 제자를 모아 놓고 불공을 드리는 형상이기 때문으로 예전에는 영축산이라 불렸다고 한다.


고려 인종때 원나라 승원명이 제자 500명과 함께 도를 득달한 후 이 산을 승달산이라 명하셨고 산세가 수려하고 주변경관이 아름다워 휴일이면 가족단위 피크닉 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현재는 이 혈아래에 목포대학교가 터를 잡고 있다. 승달산은 신안군과 서해를 내려다 볼 수 있으며 반나절이면 원점회귀가 가능해 평일에도 등반이 가능한 곳이다.


들머리는 국립목포대학교 농과대 실습장이 있는 도림리 천지골과 월산리 수월동, 몽탄면 목우암인데, 교통이 편한 천지골이 자주 이용되고 있다. 특히 천지골 오름은 노승봉과 318봉으로 이어지는 능선 위 하루재까지 임도가 뚫려 쉽게 접근할 수 있으며 이 임도가 하루재 건너의 법천사나 목우암 아래까지 이어져 있다.

 

백제 성왕 때 덕이조사가 창건했다는 법천사는 조선시대 들어서 무수히 많은 고승이 수도하던 곳으로 우리나라 불교의 4대 성지중 하나로 불린다. 조선 후기에 폐사되었지만 퇴락한 요사채가 역사를 증명해 주고 있다. 법천사 맞은편에 위치한 목우암은 승달산 제일의 명당에 자리잡았다고 한다.

 

목우암에는 2미터가 넘는 목조불과 산신각이 있으며 새로지은 대웅전이 번듯하기만 하다. 또한 남도의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어서 해발고도에 비해 월등히 뛰어난 조망을 즐길 수 있을 뿐 아니라 겨울에도 훈훈한 훈풍을 느낄 수 있는 명산이다. 그리고 토양이나 기후 조건이 야생난이 자라기에 최적의 조건을 지니고 있어 '난(蘭)'자생지로도 이름 난 곳이다.

 

 

연증산은 해발 200미터도 안되는 낮은 산이지만 무안읍 남산공원 입구에서 등산을 시작하여 연증산 정상까지는 대략 4키로미터 정도로 왕복 2시간30분 정도소요되는 거리이다

정상에서는 동서남북 전 방향의 시야가 탁 트여있어 동쪽으로 도도히 흐르는 영산강과 나주 동강들녘과 공산면 들녘 너머까지 보이고  영암 월출산과 서호들녘 그 너머로 해남군 흑석산까지 조망되고, 남쪽으로는 몽탄면 몽강들녁과 승달산, 그리고 서쪽으로는 다도해의 바다와

압해도와 팔금도, 무안 공항과 무안컨트리클럽,  피서리 해수욕장, 현경과 운남면 등이 조망된다.

 

 

 

 

 

 

 

 

 

 


 


 

 

 

 

 

 

 

 

 

▣ 승달산 정보
무안군 청계면과 몽탄면에 걸쳐있는 승달산은 백두대간의 서남부 마지막 지류로 해발 332.5m로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남도의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어서 한눈으로 다도해의 아름다운 섬들을 조망할 수 있을 뿐 만 아니라 겨울에도 훈훈한 훈풍을 느낄 수 있는 명산이다. 또한 토양이나 기후 조건이 야생난이 자라기에 최적의 조건을 지니고 있어 "난(蘭)" 자생지로도 이름난 곳이다.
승달산이라는 명칭은 고려 인종(1122년) 때 원나라 승려 원명이 이 산에 올라와 교세를 크게 떨쳤고 그를 찾아온 제자 500여명이 한꺼번에 깨달음을 얻었다는 데서 유래되었으며 법천사, 목우암, 총지사지 등 불교사적이 많다. 


 ▣ 승달산 오시는길
서해안고속도로 무안IC - 목포방면 1번국도 - 무안읍 - 청계면 - 목포대


[펌/불교신문]

 

무안 승달산

- 元 원명스님과 제자 500명 ‘수행도량’

목포의 유달산이 조선의 통치이념을 담은 유교의 색채가 강한 산이라고 하면 바로 옆 무안에는 불교의 정신을 담고 우뚝 솟아 있는 승달산이 있다.
지난 21일 무안 승달산(僧達山)을 찾았다. 곧 더위을 처분한다는 처서지만 아직 가을 냄새조차 나지 않는다. 라디오에서 폭염으로 인해 일부학교가 개학을 연기한다는 뉴스가 흘러나온다. 제일 더운 한낮을 피하기 위해 새벽부터 서둘렀지만 길이 워낙 먼 탓인지 정오가 되어서 산행을 시작한다.
승달산 정상(333m)에 서면 영산강, 목포시 그리고 다도해가 한눈에 들어온다. 흩어진 섬 사이로 바다가 들어와 있는 모습.
승달산의 산행은 보통 목포대학교이나 월암부락에서 시작해 매봉 깃봉 사자바위 하루재 법천사 목우암을 거쳐서 정상을 오르지만 더운 날을 핑계삼아 가장 짧은 코스를 택한다. 법천사에서 산행을 시작했다.
산문 아래쪽에 사찰의 경계임을 알리는 남녀 석장승이 서로 마주 보고 서 있다. 법천사 석장승(전남 민속자료 제24호)은 찾아오는 사람 누구나 환희 웃으며 반겨준다. 미소를 쳐다보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씨익하고 미소를 따라하게 된다. 법천사를 찾았다. 사천왕문을 지나니 대웅전이 활짝 핀 선홍빛 백일홍에 둘려 쌓여 있고 법당에서 노스님의 기도소리가 경내에 울리고 있다. 법천사는 백제 성왕 30년에 덕이조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오고 있다. 원나라 원명스님과 제자 500여명이 이 곳에서 수행을 한 후 모두 깨달았고 이후 산 이름이 승달산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높은 곳에 위치하진 않았지만 숲이 우거져 마치 첩첩 산중에 들어 와 있는 듯한 느낌이다. 법천사 위쪽에는 시원한 약수물로 유명한 목우암이 자리잡고 있다. 법당에 18세기에 나무로 조성된 상호가 남다른 부처님과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이 계시고 보조국사 지눌스님과도 인연이 깊은 곳이다. 스님의 호인 목우자는 스님이 이곳에서 수행을 하면서 지어졌다고 한다. 법천사 부처님께 인사를 올리고 산행을 시작했다.
하루재까지 500여 미터를 오른다. 더운 날인데도 불구하고 하늘재에 다다르니 산을 찾은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띈다. 시원한 바람이 산 아래에서 불어오고 있다. 빌딩 안에 불어대는 에어콘 바람하고는 비교할 수 조차 없는 그런 시원함이다.
<사진설명: 법천사 전경.>
정상을 향해 나아간다. 스님이 부처님께 예불을 올리는 형상을 한 호승예불 혹은 노승예불의 혈처로써 풍수지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최고의 명당으로 치는 곳이 이 산에 있다고 한다. 그래서 산 전체 수없이 많은 무덤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하루재에서 정상까지 1km 정도의 거리이다. 333m 높지 않은 산이지만 무안에서 제일 높은 산으로 정상에 서면 멋진 조망을 감상할수 있다. 운이 좋았는지 하늘이 너무도 맑은 날이다. 바다로 이어지는 영산강과 수많은 섬들 사이로 들어 와 있는 바다, 목포시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 온다.
지평선 끝까지 이어진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은 어린 시절에나 볼 수 있었던 그런 빛깔을 담고 있다. 청정지역이라는 말이 이곳에 서면 가슴으로 느껴진다. 승달산 정상은 서해바다로 떨어지는 붉은 해를 감상하는 유명한 장소이기도 하다.

법천사 입구에 서있는 석장승.


한참을 풍광에 취해 있는데 멀리서 소나기 구름이 몰려온다. 잠시 뜨거운 대지를 식히는 비가 내린다. 부드러운 흙길, 파란 하늘, 시원한 소나기 그리고 옛 스님들의 향기를 담은 승달산, 여름 한낮의 꿈같은 짧은 산행을 마친다.
무안=김형주 기자 cooljoo@ibulgyo.com
[불교신문 2355호/ 8월29일자]

 


 
 
 
 
 
 
 
 
 
출처 : 불교신문(2355호), 2007. 8. 29.
http://www.ibulgyo.com/common/news/print.asp?cat_seq=219&news_seq=82561

 유달산(儒達山)과 승달산(僧達山). 선달산(仙達山)

대부분의 풍수학자나 지명학자는 유달산과 승달산, 선달산 이 세가지 산의 이름이 어는 특별한 종과 관계가 있다고 주장을 하고 있다. 즉 유달산은 유교(儒敎), 승달산은 불교(佛敎), 선달산은 도교(道敎)와 관계가 있다는 것이며. 이들 세 개의 산은 전라남도 지역에 모여 있다는 것이다. 즉 목포(木浦)의 유달산과 무안(務安)의 승달산, 또 하나는 해남 두륜산의 지맥인 선은산(仙隱山)을 꼽고 있다.

▶ 첫째, 무안의 승달산에는 호승예불형(好僧禮佛形) 즉 승려가 부처님께 불공을 드리는 형상)의 명당자리가 있다고 하며 이곳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고 한다.
"그 날로 길을떠나 / 무안으로 작로(作路)하니 / 산진수회(山盡水回) 하는곳에 / 다소명혈(多少名穴) 없을소냐 / ..... / 사십삼절(四十三節) 건해맥(乾亥脈)에 / 승달산이 특립하니 / 금수병장(錦繡屛帳) 둘렀는데 / 우리스승 계시도다./ 당국이 평순하고 / 규모가 광대하니 / 제좌기상(帝坐氣像) 높았는데 / 산수회동 하였구나 / 천장지비(天藏地秘) 하온혈을 / 제마다 구경하리 / ..... / 성령(聖靈)은 여덟이요 / 장상은 대대로다./ 이후자손 천억이라 / 만세만세 장구하리 / 이 산로(山路) 헤아리니 / 구십팔대 향화(香火)하니 / 주인나서 찾거드면 / 일야간(一夜間)의 영장처(永藏處)라...."

이것을 대략적으로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무안지방에 산줄기가 끝나고 물이 감도는 곳에 그 숫자의 많고 적음을 떠나 당연히 명당자리가 있을 것이다. 마흔세마디의 산줄기가 서북쪽에서 내려와 승달산으로 맺혔으며 비단으로 수놓은 병풍같이 생긴 형상아래 혈이 맺혔는데 형상은 평범하게 생겼지만 규모는 광대하여 임금의 기상을 엿볼 수 있다. 하늘이 깊이 감춘 것을 저마다 찾으려고 하지만은 성인이 여덟이고, 장상(將相)은 대대로 나며 자손이 번창하며 구십팔대의 세월동안 영화를 누릴수 있는 혈이라 사람마다 찾고자 하나 컴컴한 밤에 깊이 감추어져 있는 형상이라 찾기가 쉽지 않다는 의미이다.
(신한국풍수 : 최영주 저자, 동학사 출간)

그런데 이러한 내용에는 산의 형상과 혈의 크기에 대한 이야기만 있지 내용 어디에도 어느 특별한 종교를 상징하는 이야기는 없다.

그리고 승달산에는 다음과 같은 유래가 전해온다.

승달산은 500명 불제자들이 한꺼번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호남정맥에서 서남쪽으로 갈라져 나온 산줄기로 해발 317.7m로 비교적 낮은 산이다. 하지만 각종 풍수지리서에서 호남 8대의 명혈 중 제1의 혈처를 안았다고 하는 명산이다.

풍수상으로 보면 고승이 제자들을 모아좋고 불공을 드리는 이른바 노승예불(老僧禮佛), 혹은 호승예불(好僧禮佛)의 지세라고 하면서 우연히도 승달산 자락에는 국립 목포대학교, 초당대학교, 목포기능대학등 3개의 대학교가 자리잡고 있다.

특히 새로운 전남 도청이 들어설 삼향면 남악리 지역은 풍수적으로 영암군 미암면 선황리의 선황산과 목포 유달산, 그리고 무안의 승달산 정상이 이룬 삼각형의 중심이어서 닭이 알을 품고 있는 천하의 명당이라고 말한다.
(무안군청 관광자료집 참조)

그런데 이 이야기중 앞의 내용에는 승달산에 호승예불형이니, 노승예불형이니 하는 자리가 있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뒤에는 닭이 알을 품고 있는 자리라고 이야기 하는것은 스스로의 모순에 빠진것이라고 밖에 볼 수 가 없다.

▶ 둘째, 유교를 의미한다는 유달산의 이름에는 다음과 같은 유래가 전해오지만 이러한 내용을 뒷받침 할만한 근거있는 이야기는 아무곳에도 없다는 것이다.

유달산의 유래
유달산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없다. 기록에도 분명히 나타나 있지 않다. 《한국지명총람》(14권 전남편-Ⅱ-, 한글학회)에 보면 「유달산은 유달동·서산동·죽교동·동명동의 경계에 있는 산. 높이 228m, 삼학도와 함께 목포를 대표하는 명승지로 “전남의 소금강”이라 불림. 노적봉·일등바위·흔들바위 들의 기암 절벽으로 이루어진 공원산지이다.

유달산의 이름은 한자(漢字)로 선비 유(儒) 또는 유도 유(儒)자와 사무칠 달, 이를 달(達)자를 써 유달산(儒達山)으로 쓴다. 그러나 옛날의 문헌(文獻)에서는 다르게 표기(表記)하고 있다. 한자로는 느릅나무 유, 서련쪽 유라고 하는 유(楡)자와 사무칠 달자인 달(達)자를 써서 유달산(鍮達山)이라고 하였으며 특이하게 뫼 산(山)자 대신 유달이(鍮達伊)라고 쓴데도 있고 일제시대에는 깨우칠 유(諭)자를 써서 유달산(諭達山)으로도 썼다. 그러니까 유달산을 한자로는 楡達山·鍮達山·諭達伊·諭達山·儒達山으로 쓰거나 쓰고 있다. 이렇게 한 이름을 서로 다르게 쓰고 있는 출처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 楡 達 山

유달산의 유자를 느릅나무 유(楡)자로 쓴 기록은 《증보문헌비고》(19권 여지고 7 산천편)에 나온다. 《증보국문헌비고》(명문당 발행, 상권 301쪽가) 지금의 해남군에 있는 옥천산을 기록한 내용을 보면 찾을 수 있는데 《국역증보문헌》(여지고 2권 60쪽)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옥천산(玉泉山) : 한 기슭은 서쪽으로 금강산(金剛山)에 이르러 남쪽으로 해남현(海南縣)의 치소(治所)가 있고 서쪽으로 옥매산(玉梅山), 일성봉(日星峯)에 이르러 남쪽에 우수영(右水營)에 이르며 남쪽으로 명량(鳴梁)의 포구(浦口)에 임(臨)하고 일성봉(日星峯)으로 부터 서북쪽으로 등산(登山)의 포구에 이르러 동북쪽으로 유달산(楡達山)을 사강(沙江)의 남쪽에 바라본다.」

여기서 일성봉이란 지금 해남군 화원면에 있는 일성산을 이르고 등산은 현재 목포의 해안동쪽에서 영암군 삼호면 용당리를 오가던 나루터이다. 또한 사강(沙江)이란 영산강의 옛 이름이다. 그런데 같은 기록의 바로 다음에 유달산(鍮達山)으로 씌어 있는 것을 보면 유달산(楡達山)은 기록상의 오기(誤記)라고 밖에 볼 수가 없고 또 유일하게 여기에서만 유(楡)자를 쓰고 있는 것도 이를 뒷바침한다.

● 鍮 達 山

옛문헌 가운데 나타난 기록의 거의 모두가 유달산(鍮達山)으로 되어 있다.

먼저 《세종실록지리지》(국역 세종장헌대왕실록 24권 252쪽) 전라도 나주목 영암군을 보면 「봉화가 2곳이니 갈두(葛頭)가 군의 남쪽에 있고(동쪽으로 강진 佐谷에 응하고 서쪽으로 해진 花山에 응한다.) 황원(黃原)이 군의 서쪽에 있다(동남쪽으로 花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무안의 鍮達山에 응한다.)」 《증보문헌비고》(명문당 발행 상권 301쪽 나, 335쪽 다, 450쪽 나)에도 한결같이 鍮達山으로 씌여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제 36권 무안현)의 기록에도 「鍮達山은 현(縣)에서 남쪽으로 66리 떨어져 있다(《국역신증동국여지승람》5권 46쪽)」고 씌여 있으며 유달산 봉수는 현에서 남쪽으로 해남현의 황원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나주의 군산(群山)에 응한다라고 밝히고 있다. 위의 나주 군산은 지금의 무안군 삼향면에 있는 군산동 뒷산이다. 당시 삼향면은 부곡(部曲)으로 나주목 관할인 월경지였다.

《여지도서》(무안현 산천조)에는 유달산이 씌여 있지 않고 봉수(烽燧) 가운데 유달봉수(鍮達烽燧)가 기록 되어있다.

「在縣 南 60理 南應 海南 日星山烽燧 北應 羅州 山烽燧」

비교적 근세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 《大東地志》(金正浩 編著, 무한현 산수조)에 유달산(鍮達山)의 기록이 나온다. 「현(縣)에서 남쪽으로 65리 해변에 있다.」 라고 하였으며 봉수도 유달산에 있다고 씌여 있는데 역시 유달산(鍮達山)으로 적고 있다. 신라 말엽 명승으로 알려진 최도선(崔道詵)의 《崔氏遊山錄》을 3·4조의 가사로 다시 쓴 한글판 필사본이 발견되어 1980년 5월 25일 도서출판 「광장」에서 원문과 주해설을 곁들여 책을 발행했는데, 그 기록을 살펴보니 가까운 승달산(僧達山)은 씌여 있으나 우리 고장의 유달산은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아마 그 책의 내용이 풍수지리에 관한 것이어서 음택(陰宅)으로서는 비중이 낮은 유달산까지 기록할 필요가 없었던데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道路考》(申景濬 英祖 46년 4권 2책, 2권 烽路條) 제 5거(炬)에 유달산이 씌여 있는데 거기네도 유달산(鍮達山)으로 나타나 있고 무안 목포진에 있다고 밝히고 있다.

《全羅道烽燧烟臺將卒摠錄成冊》(표지는 湖南烽臺將卒摠錄으로 되어 있음, 編著·年記 未詳 1책 19장)에도 유달산 봉수가 나오는데 「무안 유달산봉수는 목포진(木浦鎭)○장(○掌)으로 남쪽으로는 해남 황원봉수에 이르고 육로로 40리 길의 나주를 건너야 하고 북으로는 나주 군산 봉수에 응하며 관문(무안현) 남쪽 60리·본진(목포진)에서는 북향 3리에 있으며 별장 6인·군 25명·보인(保人) 48명·감고(監考) 1명·군 15명·보인 30명으로 매삭마다 별장 2인·군 15명이 돌아가며 수직한다.」라고 씌어 있다. 전라도에 봉수연대(烽燧烟臺)가 43처인데 좌연안쪽에 18처, 우연안쪽에 22처가 있고 연대가 3개라고 밝힌 이 문헌은 아마 유달산 봉수에 관한 가장 상세한 기록이 아닌가 한다. 이외에도 1871년 간행된 《호남읍지》와 1899년 간행된 《호남읍지》(무안현조)에 모두 유달산(鍮達山)으로 씌여 있다.

작자와 만든 시기가 확실하지 않은 전라도 지도가 채색으로 만들어진 80매가 있는데 이 가운데 한장이 무안 목포진 지도로 목포가 아주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여기에도 유달산의 유자는 「鍮」자로 되어 있다.

● 鍮 達 伊

《세종장헌대왕실록지리지》(국역세종장헌대왕실록지리지 24권 무안현 260쪽) 「관방(關防)은 대굴포(大堀浦, 수군처치사의 병선이 머무른다), 다경포(多慶浦), 목포(木浦)이다. 봉화가 2곳이니 유달이(鍮達伊)가 현의 남쪽에 있고(남쪽으로 영광 황원에 응하고 북쪽으로 나주 군산에 응한다) 고림이 현의 서쪽에 있다.」

유달산의 유자를 놋쇠 유자로 쓴 유래는 유달산이 마치 아침 햇살을 받으면 놋쇠가 흐른 것 같아서 붙인 이름이라 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유달이라는 이름의 어원이 무슨 형상을 나타내어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순수한 우리말의 어원을 한자로 적다 보니까 그렇게 되었다고 보는 쪽이 오히려 바른 길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 儒 達 山

유달산이라는 이름에 선비 유(儒) 또는 유도 유(儒)자를 쓰게 된 시기는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1890년 전후로 하여 시작된 것은 확실하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무정 정만조(戊亭 鄭萬朝, 1858년 생, 32세에 문과급제, 내무부참의, 궁내부대신 궁방비서관겸 참사관 역임)가 1896년 경복궁 화재사건과 명성황후 사건에 관련되었다는 이완용 등 권신들의 모함으로 진도로 유배되었을때 목포에 자주 와서 유학(儒學)을 진작시켰다.

현재 지방문화재 21호로 지정되어있는 목포시사(木浦詩社)도 무정의 발의로 지어졌고 이곳이 이 고장의 문운(文運)을 일으키는 터전이 되었는데 이 무렵 유달산의‘鍮’자를‘儒’자로 고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해서 그때부터 유달산이라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무정이 유달산의‘鍮’자를 선비 유(儒) 또는 유도 유(儒)자로 바꾸어 쓰게 한데는 인접 무안에 있는 승달산의 ‘僧’자를 의식하고 이와 비교 대칭의 뜻으로‘儒’자를 썼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전하는 이야기와 같은 유달산을‘鍮’자가 아닌‘儒’자로 쓰게 된 동기가 무정으로부터 비롯되었다면‘儒達山’이라는 명칭은 1900년을 가운데로 하여 그 이쪽 저쪽으로 보아야 한다.

● 諭 達 山

1914년 2월 28일에 발행한 《木浦誌》를 보면 유달산의 유자를 諭자로 쓰고 있다.

유달산의 유자를 깨우칠 유자로 쓰고 있는 곳은 목포지 제1편 제1장 위치·지세 기후 및 지리를 소개한 6쪽과 동 제4장 창시시대의 목포항 22쪽에 보인다.

그보다 15년 뒤에 발행한 《木浦府史(1930.12.1 발행)》에는 諭자와 儒자를 함께 쓰고 있었다. 《목포부사》 제5편 제1장 제1절 총설편 826쪽에는 諭達山으로 동 제1편 제1장 체2절 사담(史談)편 24쪽과 동 제5편 제1장 제5절 유적 명승편 876쪽에는 모두 儒達山으로 씌어 있다. 이는 아마 일인들의 식민정책을 펴면서 의도적으로 諭자를 썼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목포시청 관광자료집 참조)

■ 셋째, 도교를 의미하는 선달산은 인근지역에서 찾아볼 수 가 없다는 것이다. 다만 최창조 교수가 해남 두륜산의 지맥인 선은산(仙隱山)을 선달산으로 추정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도 설득력 있는 해석으로 볼수 는 없다. 숨는다는 의미의 은(隱)자가 통달한다는 의미의 달(達)자로 바뀌는데는 어떤 문법으로 해석을 할것인가?

우리가 보통 글자의 발음이 변하는 경우는 자음은 같고 모음이 변하는 경우와 무성음이 유성음으로 변하는 경우는 있어도 모음 자체가 변하거나 유성음이 무성음으로 변하는 경우는 없는 것으로 안다.

예를 든다면 소야가 소이, 소여, 서야 등으로, 두류가 두리, 도리, 두로 등으로, 도계나 계산이 도개나 개산 등으로 변하는 것을 보더라도 단어의 앞에 나오는 자음은 변하는 않으며 뒤에 나오는 모음이 변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 아닌가?

이러한 내용을 볼 때 이 세 개의 산이 유교와 불교, 도교와 관계가 있다는 설득력 있는 근거는 아무곳에도 없다.

따라서 필자는 유달산이나 승달산, 선달산이 종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닭(鷄,酉)을 상징하는 말이며 이것은 모두 풍수지리학과 관련이 있는 이름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 첫째, 목포의 유달산(229m)과 그 주위에는 서산동, 죽교동, 양동, 달명동, 덕산, 달성동, 용당동, 달리도, 갈마산, 마골산, 장감리 등이 있는데 이들의 지명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 서산동 : 새의 둥지가 있는 산이라는 의미인 소산(巢山)의 발음이 변화된 것이다.
※ 이와같은 의미로 쓰인 예
① 충청남도 서산시와 예천동, 양대동(陽垈洞), 죽성동(竹聲洞)과 오남동(梧南洞), 오산동(梧山洞) 등이 있다.
예천동 : 닭이 있는 냇물이라는 의미인 유천동(酉川洞)의 발음이 변화된 것이다.
양대동 : 닭이 울어 날이 밝는다는 의미이다.
죽성동 : 대나무숲에서 봉황의 울음소리가 들린다는 의미이다.

② 전라남도 나주시 남평읍 서산리와 교원리, 교촌리, 오계리 등이 있다.
교원리, 교촌리 : 닭이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인데 닭을 달로 발음하고 이것을 다리라는 의미로 잘못 해석한 것이다.
오계리 : 검정닭을 의미하는 것이다.

③ 전라남도 광양시 봉강면 서산과 응방산, 덕예리 등이 있다.
응방산 : 닭과 상대적 관계인 매를 상징하는 것이다.
덕예리 : 닭장에 있는 닭이라는 의미인 덕유리의 발음이 변화된 것이다.

? 죽교동 : 여기에서 죽(竹)은 대나무를 말하는 것으로 봉황을 상징하는 것이고 교는 닭을 말하는 것인데 닭이 달이 되고 다시 다리로 이것을 한자로 교량(橋樑)이란 말로 잘못 해석한 것이다.
※ 이와같은 의미로 쓰인 예
① 경상북도 청도군(淸道郡) 화양읍 교촌리와 유등리(酉登里), 신봉리, 화양읍 등이 있다.
유등리 : 닭이 날아오른다는 의미이다.
신봉리 : 새가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이다.
화양읍 : 닭장안의 횃대를 의미하는 것이다.

? 양 동 : 닭이 울면 날이 밝는다는 의미이다.
※ 이와같는 의미로 쓰인 예
① 경상남도 양산군 양산읍과 오봉산(五峰山), 유산리(酉山里), 중부리와 남부리, 신기리(새터) 등이 있다.
오봉산 : 닭의 부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유산리 : 닭이 있는 산이라는 의미이다.
중부리, 남부리 : 새의 부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신기리 : 새가 있는 장소라는 의미인 새터를 새로 생긴 터라는 의미로 잘못 해석한 것이다.

②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양동리와 봉정리(鳳停里), 문덕면, 갈마치(渴馬峙) 등이 있다.
봉정리 : 새가 머물러 있다는 의미이다.
문덕면 : 닭장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온다는 의미이다.
갈마치 : 옛날에는 닭장을 마굿간에 지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③ 경상북도 포항시 안강읍 양동리(陽洞里)와 안계리, 달전리, 유금리(酉禽里) 등이 있다.
안계리 : 닭을 오행으로 구분하면 백(白)이되고, 백을 은(銀)으로 표현한 것의 발음이 변화된 것이다.
유금리 : 닭이 새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 달명동, 달성동 : 닭의 울음소리를 상징하는 것이다.
※ 이와같은 의미로 쓰인 예
① 전라남도 장성군 북이면 달성리와 원덕리, 신월리와 백암리(白岩里) 등이 있다.
백암리 : 은 닭을 오행으로 구분하면 서쪽이 되며, 색깔로는 백(白)이 된다.

? 덕 산 : 닭장이 있는 산이라는 의미이다.
※ 이와같은 의미로 쓰인 예
① 전라북도 진안군 상전면 대덕산과 닭이 있는 고개라는 의미인 유치(酉峙), 닭이 새라는 의미인 신괴리 등이 있다.

? 용당동 : 닭의 용이라는 의미인 용달의 달을 달다는 의미인 당(糖)과 사당을 의미하는 당(堂)으로 해석한 것이다.
※ 이와같은 의미로 쓰인 예
① 경기도 화성군 양감면 요당리와 닭장을 의미하는 덕지산, 마굿간에 있는 닭을 의미하는 삼계리, 새의 둥지를 의미하는 어소리 등이 있다.

② 전라남도 순천시 용당동과 새가 있는 골짜기라는 의미인 조곡리(鳥谷里), 닭장을 의미하는 덕암동, 닭과 상대적 관계인 매를 의미하는 매곡동 등이 있다.

? 달리도 : 닭이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인 달리에 섬도(島)자가 붙은 것이다.
※ 이와같은 의미로 쓰인 예
① 경상북도 포항시 죽장면의 달리방과 석계리, 합덕리, 당말, 양지리 등이 있다.

갈마산, 마골산 : 옛날에는 닭장을 마굿간에 지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 이와같은 의미로 쓰인 예
① 대전광역시 갈마동과 마봉재, 갑옷을 의미하는 갑천, 용계동, 가정동 등이 있다.

? 장감리 : 닭이 감추어져 있다는 의미인 장닭을 발음대로 읽으면 장달이 되는데 여기에서 달을 달다는 의미인 장감(藏甘)으로 잘못 해석한 것이다.
※ 이와같은 의미로 쓰인 예
① 경상남도 김해시 대동면 대감리와 닭장을 의미하는 덕산리, 닭이 머물러 있다는 괴정리, 닭을 상징하는 냇물이라는 감천(달천-감천) 등이 있다.

②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감고리와 닭장에서 닭의 울음소리가 들린다는 덕음산, 닭장을 의미하는 천덕리, 닭장을 침입하는 구렁이를 의미하는 광사리 등이 있다.

▶ 둘째, 무안의 승달산317m)과 청계리(靑鷄里), 청계천, 달산리, 봉명리(鳳鳴里), 감돈리, 도림리(到林里), 금곡(禽谷) 등이 있다.

? 청계리, 청계산 : 닭을 의미하는 것인데 여기에서 말하는 청은 푸른색을 의미하는 것인데 이것은 실재의 색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행(五行)으로 구분하는 색깔을 말하는 것으로 산맥의 흐르는 방향을 말하는 것이다.
※ 이와같은 의미로 쓰인 예
① 경기도 과천시(果川市) 청계산과 닭과 상대적 관계인 매를 의미하는 응봉(鷹峰), 새가 있는 동산이라는 의미인 신원동(새동산) 등이 있다.

② 경상남도 합천군 야로면 청계리와 닭이 있는 마을이라는 월막리, 새가 있는 들이라는 의미인 금평리(새들), 닭과 상대적 관계인 매를 의미하는 매촌리 등이 있다.

? 달산리 : 닭이 있는 산이라는 의미이다.
※ 이와같은 의미로 쓰인 예
① 경상북도 군위군 우보면 달산리와 새가 있는 산이라는 의미인 봉산리, 닭장에서 닭의 울음소리가 들린다는 의미인 문덕리, 닭과 상대적 관계인 매를 상징하는 매봉리 등이 있다.

② 경상북도 영덕군 달산면과 닭장을 의미하는 덕산리와 덕갈산, 흰닭을 의미하는 옥계리, 닭과 상대적 관계인 매를 상징하는 매일리와 주응리(住鷹里) 등이 있다.

③ 경상북도 군위군 소보면 달산리와 신계리 등이 있다.

? 봉명리 : 새가 운다는 의미인데 여기에서 말하는 새는 봉황 또는 일반적인 새 등 두가지 의미로 해석할수 있다.
※ 이와같은 의미로 쓰인 예
① 충청남도 공주시(公州市) 계룡면 봉명리와 닭을 의미하는 월암리와 유평리 등이 있다.

? 감돈리 : 닭이 날아든다는 의미인 달도리의 의미를 달다는 의미인 감도리로 해석을 한 것인데 여기에서 돈이라는 글자는 잘못 발음된 것으로 생각된다.
※ 이와같은 의미로 쓰인 예
① 경기도 시흥시 목감동과 새를 의미하는 조남동, 닭을 의미하는 박달동 등이 있다.

? 도림리 : 새가 둥지에 들기위해 숲에 도착했다는 의미이다.
※ 이와같은 의미로 쓰인 예
① 인천광역시 연수구 도림동과 학을 의미하는 선학동(仙鶴洞), 청학동(靑鶴洞), 논현동 등이 있다.

② 충청남도 천안시(天安市) 성거읍 도림리와 구름가운데 있는 둥지라는 의미로 학의 둥지를 상징하는 서운산, 역시 학을 상징하는 송산리, 송정리, 닭장안의 횃대와 닭을 의미하는 효계리 등이 있다.

③ 전라북도 고창군 신림면 도림리와 새가 숲에서 춤을 춘다는 의미인 무림리(舞林里), 매를 의미하는 매봉재, 닭을 의미하는 용교리 등이 있다.

? 금 곡 : 새가 있는 골짜기라는 의미이다.
※ 이와같은 의미로 쓰인 예
①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금곡리와 오남리, 양지리 등이 있다.
오남리 : 봉황이 둥지를 짓는 오동나무를 상징하는 것이다.
양지리 : 닭이 울면 날이 밝는다는 의미이다.

② 충청북도 영동군 용산면 금곡리와 가곡리(歌谷里) 등이 있다.
가곡리 : 새가 골짜기에서 노래한다는 의미이다.

③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과 덕봉산과 덕의동이 있고, 학선리(鶴仙里) 등이 있다.
덕봉산, 덕의동 : 닭장을 의미하는 것이다.
학선리 : 신선이 학을타고다닌다는 의미이다.

▶ 셋째, 해남의 선은산(270m)과 비조산(飛鳥山), 월호리, 연정리, 관동리, 선창리(扇唱里) 등이 있다.

비조산 : 새가 나는 산이라는 의미이다.
※ 이와같은 의미로 쓰인 예
① 경상남도 창녕군(昌寧郡) 창녕읍 조산리(鳥山里)와 용소리(龍巢里), 신촌리 등이 있다.
조산리 : 새가 있는 산이라는 의미이다.
용소리 : 새의 둥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신촌리 : 새가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인 새마을을 새로생긴 마을이라는 의미로 잘못 해석한 것이다.

② 경상북도 김천시 대덕면 조룡리와 윗새재와 아랫새재, 닭장을 의미하는 대덕면, 가례리 등이 있다.
조룡리 : 새의 용이라는 의미이다.
새 재 : 새가 있다는 것을 고개이름에 적용한 것이다.
가례리 : 닭이 노래한다는 의미인 가유리의 발음이 변화된 것이다.

? 월호리 : 닭장을 침입하는 여우를 상징하는 것인데 여기에서는 닭을 하늘의 달로 잘못 해석한 것이다.
※ 이와같은 의미로 쓰인 예
① 충청남도 논산읍 노성면 호암리(狐岩里)와 덕지리, 가곡리(歌谷里) 등이 있다.

② 충청남도 서천군(舒川郡)서면 월호리와 월리, 개야리, 신합리 등이 있다.
개야리 : 닭을 의미하는 鷄也里와 닭이 있는 들이라는 의미인 鷄野里 등 두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신합리 : 닭이 새라는 의미인 조계(鳥鷄)를 바다에서 나는 조개(蛤)로 잘못 해석한 것이다.

? 연정리 : 직접적인 해석은 연꽃이 머물러 있다는 것인데 여기에서 말하는 연꽃은 닭의 벼슬모양을 상징하는 것이다.
※ 이와같은 의미로 쓰인 예
① 전라북도 고창군 심원면 연화리와 황계산, 월산리 등이 있다.
황계산 : 황계의 황은 오행(五行)적인 표현으로 산세가 바위가 거의 없는 흙으로 이루어진 산이라는 의미이다.
월산리 : 닭이 있는 산이라는 의미인 달산의 달을 하늘의 달로 잘못 해석한 것이다.

② 경상남도 김천시 대덕면 연화리와 대덕산, 덕산리, 외감리, 내감리, 관리 등이 있다.
감 리 : 닭이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인 달리의 달을 달다는 의미로 잘못 해석한 것이다,
관 리 : 닭이 벼슬을 의미하는 것이다.

③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연정리와 가천리(歌川里), 화산과 화산리(花山里), 당지리 등이있다.
가천리 : 새가 물가에서 노래한다는 의미인 歌川里와 하늘에서 노래한다는 의미인 歌天里 등 두가지로 해석할수 있다.
화산, 화산리 : 닭의 벼슬을 의미하는 것이다.
당지리 : 닭을 의미하는 것이다.

관동리 : 닭의 벼슬을 상징하는 것이다.
※ 이와같은 의미로 쓰인 예
① 경상남도 산청군(山淸郡) 단성면 관정리와 덕동, 남사리, 등이 있다.
덕 동 : 닭장을 의미하는 것이다. ,
서촌, 소남리 : 새의둥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남사리 : 닭장을 침입하는 구렁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② 전라남도 장흥군 관산읍과 덕정, 옥당리, 고마리 등이 잇다.
덕 정 : 닭이 닭장에 머물러 있다는 의미이다.
옥당리 : 흰색의 닭을 말하는 옥달의 달을 달다는 의미로 해석한 것이다.
선창리 : 선은 새의 날개를 의미하는 것이고 창은 새가 노래한다는 의미이다.
※ 이와같은 의미로 쓰인 예
①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창선리와 월성리, 농산리 등이 있다.
월성리 : 닭의 울음소리인 달성의 달을 하늘의 달로 잘못 해석한 것이다.
농산리 : 새가 산에서 노래한다는 의미이다.

▶넷째, 경상북도 영주시와 영월군과 봉화군의 경계에 있는 선달산과 새밑재, 박달령 등이 있다. 선달산이라는 지명이 나오는데 이곳은 유달산이나 승달산과는 거리가 수백리 떨어진 경상북도 최북단에 위치한 것은 어떻게 해석할 것이며 이 또한 종교를 연상시킬 만한 내용은 어디서도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이곳 선달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본래 선달산(仙達山:신선이 놀던곳) 이라고도 하며, 先達山(먼저 올라가야하는산) 이라고도 한다. 선달산 북쪽에는 용아골, 칠룡골(七龍谷)이 있는데 용아골(龍芽谷)은 선달산 내맥(來脈)이 이어왔다는 뜻이며, 칠룡골은 일곱능선이 함께 선달산으로 내려왔으니 남으로는 봉황산, 서로는 회암산 형제봉과 소백산이요 동쪽에는 옥석산, 동남족에는 문수산 예배봉으로 만산(萬山)이 에워싸고 있으니 오르는 자만이 느낄수 있는 향유의 기쁨을 안겨주는 산이다.

그런데 이곳에 나오는 선달의 의미에 대한 해석은 설득력이 있는 해석이라고 볼수 없다. 선달의 달자가 논다는 의미와 먼저 올라가야 한다는 의미는 어디에 근거한 해석인가?
이곳 주변의 지명은 오히려 닭과 곤련된 해석으로 보는 것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고 볼수 있다.
칠룡골 : 칠봉(七峰)이라고도 하며 닭의 벼슬을 상징하는 것이다.
회암산 : 닭장안에 닭이 올라가 걸터앉는 횃대를 상징하는 것이다.
문수산 : 숲속에서 새의 울움소리가 들려온다는 의미이다.
소백산 : 여기에서 백(白)은 오행으로 서쪽을 말하며, 서쪽은 유(酉)이며 동물로는 닭을 상징하는 것이다.

? 새밑재 : 이것은 글자 그대로 날짐승인 새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새는 닭을 지칭하는 말이된다.

? 박달령 : 닭을 상징하는 이름의 하나로 박은 백(白)의 발음이 변화된 것이고 달은 닭을 소리나는대로 적은것이며 닭을 오행으로 구분하면 백(白)이 되며, 동물로 구분하면 유(酉) 즉 닭이 되는 것이다.

 

 

 

인도의 전법자들은 왜 승달산을 선택했나?
■무안품바의 뿌리를 찾아서<김대호/성화대학 겸임교수>
2. 인도 대승불교의 무안군 승달산으로의 전래과정
2011년 04월 02일 (토) 11:45:09 김대호 성화대 겸임교수

   
지난 2월19일 무안군 청계면 도대리 일로품바전수관에서는 ‘일로품바 활성화와 자원화에 대한 워크숍’이라는 의미 있는 행사가 열렸다.

성화대학 김대호 겸임교수의 사회로 이윤선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교수의 ‘품바와 무안, 장소화 전략’이라는 기조발제를, 정유철 전남일보 논설위원, 박관서 다도해문화예술교육원 원장, 정삼조 남도문화디자인연구소 소장, 김승덕 품바4대 고수의 토론이 이어졌다.

이날 토론회를 통해 일로품바의 발전전략에 앞서 두 가지 과제가 무안군에 주어졌다.

‘일로품바는 한국품바를 대표할 수 있는가?’와 김시라의 연극품바와 난장품바 중 어떤 형식을 수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주)무안신문사에서는 일로품바의 글로벌 관광자원화를 위해 반듯이 해결해야 할 ‘품바의 대표성과 장소성’ 문제와 ‘일로품바의 자원화 전략’에 대해 대안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이에 따라 김대호 성화대학 겸임교수의 일로품바의 역사적 고찰과 자원화를 주제로 원고를 4회에 걸쳐 게재한다.<편집자주>

   
▲ 승달산과 목우암

▲고대 영산강 일대는 독자적 세력이 지배했다.

전남 서남부 지역 해상에 대한 중앙의 지배력이 확보된 것은 조선조에 이르러서 였다. 고려 말까지 공도(도서민의 내륙으로의 강제 이주)로 해상세력에 대한 국가적 탄압이 이르러 졌고 조선조에 이르러서는 법제화돼 명의 해금정책을 차용한 공도화정책이 시행됐다. 이것은 중앙권력의 통치권이 미치지 못한 독자적 해상세력이 존재했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무안반도의 역사는 구석기 신석기시대를 거쳐 고대국가까지 이어지는데 간척으로 소실됐지만 일로읍과 몽탄면, 청계면 등 무안반도와 영산강 일대는 한반도의 2/3를 차지하는 거석(고인돌)문화가 존재했다.

진서(晋書), 장화열전(張華列傳) 등에 따르면 3세기 무안군 등 전남서남부지역은 거대한 옹관고분을 사용하는 마한의 20여 왕국의 연맹왕국인 신미제국(新彌諸國)이 통치하고 있었는데 이들의 장고분(長鼓墳)이 일본의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과 흡사한 것으로 보아 고대 일본의 문명 발생관 연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마한을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이 복속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실재로는 근초고왕에 이르러서야 전남서남부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무안과 영산강 일대는 출발부터 내륙세력과 구별되는 독자적 세력에 의해 지배되었고 그 중심에 승달산이 있었다.

▲승달산은 신라 대승불교의 시배지(始培地)이었다.

새로운 사상이나 종교, 정치세력 등의 출발점에는 3가지 기본조건이 필요하다. 자급 가능한 너른 토지와 백성, 그리고 군사적으로 활용 가능한 요충지의 확보다.

그런 측면에서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된 영암 상대포(당포)의 월출산은 골이 깊지 않고 암반이 많아 노출이 심해 성곽을 축조하고 방어를 하기에 충분치 않은 지형이다.

그에 반해 승달산은 해발 318.9m로 산이 높지 않으나 4계절 물이 흐르고 지형이 제갈량이 육손이를 격퇴할 때 썼던 팔괘진(八卦陣)과 흡사한 지형을 갖추고 있어 지리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다.

팔괘진법(八卦陣法)은 전군을 8개 단위 병력으로 나누어 사용하는데 진(進)과 퇴(退)가 따로 둘이 아니어서 변화가 무궁무진하다. 전면을 치면 후미가 돕고 중간을 끊으면 앞뒤가 협공하기 때문에 1천 병력으로도 10만 대군을 상대할 수 있는 기묘한 진법인데 승달산의 지형지세가 그러하다.

청계면 월선리의 운중수월(雲中囚月) 지형처럼 입구가 좁아 멀리서는 목적지가 분명히 보이나 안으로 들어가면 너른 벌이 나와 사방을 분간 할 수 없는 미로지형, 몽탄면 느러지는 좁은 입구와 달리 들어서면 내리의 너른 벌이 나온다. 총지사의 쥐꼬리 명당, 남악 오룡의 복잡하고 좁은 바다를 지나 나타나는 일로 감돈리 지역, 복길 바다를 통해 들어오는 도림리, 청천리, 몽탄의 파군교 등 승달산에는 여덟 곳의 쥐꼬리 지형이 10만 군사의 몫을 대신하고 있어 능히 10만 군사를 상대할 수 있는 지역이었다. 그래서 성곽을 축조하지 않고도 능히 장성의 역할을 할 수 있어 수많은 풍수전문가들이 말했듯이 왕과 왕후의 기운이 있는 명산으로 꼽는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8괘의 지형지세인 몽탄면 청용리 파군교 지역을 이용한 군사작전으로 김유신장군은 백제군을 격퇴하고 삼국통일의 기틀을 다졌으며 왕건 또한 견훤군을 격퇴하고 후삼국을 통일 할 수 있었다.

무안으로 작로(作路)하니/산진수회(山盡水回) 하는곳에/다소명혈(多少名穴) 없을소냐/...../사십삼절(四十三節) 건해맥(乾亥脈)에/승달산이 특립하니/금수병장(錦繡屛帳) 둘렀는데/우리스승 계시도다./당국이 평순하고/규모가 광대하니/제좌기상(帝坐氣像) 높았는데/산수회동 하였구나/천장지비(天藏地秘) 하온혈을/제마다 구경하리/...../ 성령(聖靈)은 여덟이요/ 장상은 대대로다./이후자손 천억이라/만세만세 장구하리/이 산로(山路) 헤아리니/구십팔대 향화(香火)하니/주인 나서 찾거드면/일야간(一夜間)의 영장처(永藏處)라...."
<도선국사는 옥룡자유산록에서>

이 외에도 격암 남사고의 격암유록에는 승달산(僧達山)은 ‘호승예불형(胡僧禮佛形, 노승이 부처님에게 예를 표하는 형)’ 명당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민족종교를 표방하는 몇몇 종교의 경전에서도 ‘후천오만년의 대운(大運)’이 열리는 성지로 기록되고 있다.

2대 제왕의 기운을 가지고 있어 부친 남연군의 묘를 이장하기 위해 흥선대원군에 의해 폐찰 된 가야사의 운명과 같이 승달산의 총지사 또한 후천오만년의 대운이 열리는 쥐꼬리 명당에 자리 잡았던 이유로 폐찰의 수난을 당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풍수’를 쓴 일본이 무라야마지쥰은 승달산 호승예불형 명당을 파헤치고 쇠말뚝을 박아 사람들이 명당을 찾지 못하게 했다는 설도 있다.

영암 구림의 사생아 도선은 풍수지리를 통해 왕건에게 체계적인 군사학 강의를 하였고 제자는 골품제도를 붙들고 있던 천녀왕국을 무너뜨린다. 이처럼 지관들의 풍수지리에는 정치세력 간의 복잡한 이해관계와 정치적 함수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백성들에게는 미래에 대한 예언자적 기능을 담당하기도 했지만 역으로 지배층들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활용되기도 했다.

신라에는 6두품 출신의 유학파들이 있었다. 이들이 정치세력화 하기 위해서는 우호적인 세력을 모아 교두보를 확보하고 백성들의 지지를 받아야 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해석 해 본다면 막강한 정치군사력과 행정망을 가지고 있고 상위계급과 기득권층이 세를 확보하고 있는 서라벌에서의 새로운 사상에 대한 실험은 모험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중앙정부의 통제로부터 자유로운데다 적절한 소외의식과 긴장관계까지 유지하고 있고 중국, 왜 등과 오랜 교역을 통해 외부 침투에 비해 개방적인 정서를 가진 승달산 등 연안지역은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불교의 기운이 쇠한 조국을 떠난 인도의 밀교승들과 당나라 유학을 통해 새로운 사상과 종교를 받아들인 혜공대사와 혜통대사와 같은 유학파들은 무안에서 새로운 이상향의 실험에 들어가는 것이다.

사기(寺記)에 따르면 법천사는 552년(백제 성왕30년) 덕예(德隸)스님이 창건했다고 하지만 총지사와 함께 신라 성덕왕 때인 725년 인도 간다라국의 정명(淨明)스님이 세웠다는 설도 있다. 혹은 신라 대승불교의 시조인 혜통스님 창건설도 등장한다.

무안현 남쪽 30리에 진산(鎭山)으로 세상에 전해졌다. 원 시대 임천사(臨川寺) 원명(圓明)스님이 바다건너서 왔다. 이 산을 택하여 풀을 엮어서 암자를 만들었고, 그 임천사(臨川寺)에 있는 제자들은 오백 명이 되는데, 원명을 찾아 이 산에 이르러, 모두 달도(達道)하였다. 이로 인하여 승달산(僧達山)이라고 한다.
<동국여지승람 삼십육권>


세 사찰의 창건설화에 모두 인도 스님들이 등장한다. 725년은 인도의 밀교승들이 대거 당나라로 이주해 포교활동을 벌이던 시기이며 대승불교의 한 일파인 라마불교를 국교로 삼은 원나라의 인도스님 원명의 전설로 보아 승달산 일대의 불교는 밀교적 색체가 강한 대승불교가 새로운 이상향을 준비하는 교두보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대승불교, 신라의 골품제도를 흔들다.

당시 신라불교는 왕족은 물론 명문귀족들이 출가를 독점하고 있었다. 호족을 통합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목적으로 활용되어 백성들과는 괴리가 있었다. 전륜성왕론(轉輪聖王論)의 관점으로 왕권이 곧 불권(佛權)이었고, 군사적 입장에서는 ‘불살생’의 계율을 ‘살생유택’으로 재해석하고 전장에서 사상적 선봉에 서거나 적국에 대한 첩보활동까지 서슴지 않았다. 진평왕 때 원광법사(圓光法師)는 화랑에게 일러 준 ‘세속오계’가 대표적인 사례라 볼 수 있다.

7세기에 이르러 불교계에 6두품 출신들의 진출이 시작된다. 신분제도에 대한 불만과 이로 인해 새로운 이상향에 대한 욕구가 강했던 이들은 당나라에 유학해 선진사상과 밀교를 공부하고 신라의 정치체제와 불교에 변화를 도모하게 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혜공대사는 천진공(天鎭公) 집에서 품팔이를 하는 노구의 아들’이었으며 같이 유학했던 명랑대사는 비교적 낮은 벼슬인 사간의 아들이었다. 원효대사는 6두품이었고 혜통대사 또한 한미한 집안의 자식이었다. 명랑대사는 귀족출신 어머니와 서민출신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설이 있다. 골품을 뛰어넘는 결혼을 통해 태어난 새로운 계층들과 6두품들이 역사에 전면에 나서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승달산 연안에서 충분한 실험을 통해 교두보를 확보한 이들은 서라벌에 돌아가지만 기득권층의 반발은 당연한 결과이었다. 그래서 탄압기 인도밀교가 그러했듯이 비밀스러운 포교의 형태 즉 밀교적 포교방식이 사용된다. 우선 백성들의 지지를 확보해야 했다. 문자를 모르는 일반백성들에게 가장 설득력 있는 형태의 포교는 춤과 노래이었다.

대안대사는 저자에서 ‘대안가’를 혜공대사는 ‘부궤무’를, 원효대사는 ‘무애무와 무애권선가’ 등으로 만행을 하며 백성들의 주목을 끌고 서서히 세력을 확대해 간다. 원효대사의 아들 설총이 어려운 한자 대신 일반 백성들이 쉽게 배울 수 있는 이두문자 개발에 나선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마침내 이들의 노력이 성과를 거둬 원성왕 4년(788년) 골품제도를 기초로 한 벌족(閥族) 위주의 인재 등용에도 일부 변화가 일어나 학벌로 관리를 채용하는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가 시행된다. 6두품 원효대사는 골품의 최상위에 있는 요석공주와 혼인을 하고 세 대사의 뒤를 이어 신라밀교인 진언종의 시조가 된 ‘품팔이 노구의 아들’ 혜통대사는 신문왕대에 이르러 국사에 봉해지게 된다.

그러나 이들 중 상당수는 기득권으로의 진출로가 확보되자 신라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의지는 쇠퇴해 갔고 백성들은 더 이상 그들을 저자에서 볼 수 없었다.

▲승달산은 해상세력과 내륙세력의 경계선.

   
▲ 일로읍 회산백련지에서 열린 품바 경연대회
"진성여왕 때의 아찬 양패는 왕의 막내아들이었다. 당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에 백제의 해적들이 진도에서 길을 막는다는 말을 듣고 활 쏘는 사람 50명을 뽑아 따르게 했다. <삼국유사 기이제2>

여기서 말하는 백제는 후백제로 당시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는 세력은 능창이라는 인물이었다. 나주는 고려의 2대 왕후인 장화왕후의 아버지인 오다련이 장악하고 있었으나 그 세력은 승달산을 접점으로 서남해안의 해상세력까지는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무안군 청용리 파군교와 신안군 압해면의 고이도 등 승달산 인근지역은 전삼국과 후삼국의 통일 과정에서 최고의 군사적 요충지로 내륙으로의 진출과 서남해안의 제해권과 더불어 중국과 일본과의 군사적 동맹관계를 규정짓는 주요한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최고의 군사적 전진기지이자 최후의 방어선으로서 양보할 수 없는 지점이었으며 왕건은 이 지역의 해상권을 장악하고서야 삼국을 통일 할 수 있었다.

장보고의 청해진부터 시작해, 견훤과 능창(수달), 고려 초 반란을 일으켰던 왕망, 1232년 원나라 제독 차라대를 격퇴했던 압해도민 등 해상세력들은 중앙정부에게 늘 위협적인 존재였다.

외세에 항복해 백성들로부터 지지를 잃은 고려정부에게 끝까지 저항하는 삼별초와 해상세력들은 위협적일 수밖에 없었고 고종 때부터 본격적으로 공도(섬 주민을 육지로 강제 이주시키는 행위)를 시작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거제도(1271원종12), 진도(1350 충정왕2), 남해도(1351 공민왕, 압해도, 장산도, 흑산도 나머지 섬들에 대한 공도를 실시한다. 이 섬들은 하나같이 군현이 설치될 정도로 비중 있는 데도 굳이 섬을 비우려는 의도는 명확하다. 삼별초와 토착해양세력이 결합해 남해안의 해상권을 장악한 상태인데다 이들이 본격적으로 대몽항쟁에 나섬으로써 정통성을 상실한 고려정부는 백성들에게 조롱거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고려 말의 공도는 조선왕조 들어 일시적 ‘조치’를 넘어 공도정책으로 법제화 된다. ‘궁(宮)의 허락 없이 몰래 섬에 들어간 자는 1백대의 장형을 받는 것으로 규정되었으며 심지어 섬에 도피 은닉한 죄는 본국을 배반한 죄에 준하는 것으로 다스려져야 한다.’는 상소까지 있었다.

국제 해상무역을 주도하고 외세와의 완충역할을 하던 해상세력이 명과 조선의 해금정책으로 몰락하면서 조선은 국제무대에서 사라져 갔고 국력은 약해질 대로 약해졌다. 가장 치명적인 피해를 입은 일본의 해상세력은 왜구가 돼 서남해안과 중국까지 침탈해 노략질을 일삼게 된다.

이러한 밀교적 전통 외에도 조선개국과 세종의 왕의찬탈 과정에서 절의파들의 호남 이주가 이어졌고 기묘사화, 기축옥사 등이 이어지면서 전라도 사림의 중앙정계로의 진출 좌절되게 된다. 전라도가 주요 유배지가 되면서 지방 세력과 결합한 독특한 유배문화가 성립되고 성리학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우물 안에 갇힌 조선사회를 변화를 촉구하는 실학사상도 태동하게 된다.

이렇게 일로품바의 태생지로서 무안군과 승달산 연안이 가지는 장소성과 역사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다음호에서는 한국 대승불교의 토착화와 몰락의 역사, 그 과정에서 어떻게 일로품바가 탄생됐었는지에 대해서 글을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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