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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행공부/♣ 등산교실

산에서 길을 잃는 세 가지 공식

by 강릉벽소령 2011. 8. 4.

지난해 '지리산길'이 처음 생겼을 때였다. 지리산길엔 솔방울 모양의 방향 표시가 설치돼 있는데 '빨치산 병원'으로 쓰였다는 벽송사 지나서부터 이 표시가 눈에 잘 띄지 않았다. 일단 가는 데까지 가보기로 했다. '출입 금지 구역' 철조망이 앞을 가로막기에 왼쪽에 보이는 작은 흙길로 꺾었다. 어째 등산로가 점점 좁아지고 나무가 양옆에서 조여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내려온 길을 돌아보니 다시 올라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맑은 날인데 울창한 나무가 하늘을 가려 컴컴했다. 뒤를 돌아보니 저런 길을 헤쳐왔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빼곡한 숲만 턱 버티고 있을 뿐이다. '내려가다 보면 산 아래 마을에 닿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는 낭떠러지 앞에서 무참히 증발했다. 10여분 만에완전히 길을 잃은 것이다.

지리산길 관계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희가…길을 잃었는데요." "이정표나 표지나 특이한 나무나 바위 안보이세요?" "네? 저…소나무가 많고요…꺾인 나무가…많고…저…." 산에서 길을 잃어본 사람들은 안다. 그 막막함과 답답함, 10분 전에 지나왔던 길이 어느 쪽에 있는지조차 감이 잡히지 않는 숨 막히는 당혹을.

그 후로도 취재 중 몇 차례 산에서 길을 잃었다. 반복하다 보니 '산길 조난'에도 일종의 패턴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1단계, 어쩐지 길이 약간 복잡하게 느껴진다. 이어지던 나무 데크가 사라진다거나 길이 급격히 좁아지는 식이다. 그러나 대안이 없으니 '일단 가보자'라고 발을 떼게 된다. 2단계, 길에 대한 확신이 90% 사라진다. 낙엽이 허벅지 높이까지 쌓여 있고 바지 끝자락이 자꾸 나뭇가지에 걸리고 한 마디로 사람이 다니지 않은 길 같다.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이 시점에서 대부분 이런 말이 나온다. "내리막 따라가다 보면 산 아래까지 닿겠지, 뭐. 지금 돌아가면 내려온 길을 돌아서 오르막을 걸어야 한다고!" 내려온 길을 다시 올라간다는 건 어쩐지 억울한 기분이 든다는 이유로 마음 속의 의심을 싹둑 잘라버린 채 내리막을 계속 걷게 된다.

근거 없는 낙관론의 최면에 걸려서 그냥저냥 내려가다 보면 3단계에 맞닥뜨린다. 도저히 인간의 능력으론 걸을 수 없는 길이 앞을 가로막는다. 나무 사이 공간이 강아지 하나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좁거나 발 아래 낭떠러지라든가 하는 극단적 상황에 입이 떡 벌어진다.

산길 생존을 위해 준비하면 좋은 '소품'이 몇 가지 있다. 등산지도와 나침반, 잘 터지는 휴대폰(산에선 3G보다 2G 휴대폰이 잘 터진다), 위성으로 산길을 안내하는 휴대용 GPS 단말기, 혹은 산길에 통달한 전문 가이드. 그러나 경험상 '잃어버린 산길'을 되찾는 데 가장 중요한 건 이 길이 아님을 '몸'이 느끼는 순간 발길을 되돌리는 결단력이다. 설령 돌아가는 길이 숨이 턱까지 차오를 게 뻔한, 가파른 오르막이라도 말이다.